완벽주의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뭐든지 완벽하게 하려는 성향을 말하죠.
그런데 문제는 완벽할 수가 없다는 사실이 문제입니다.
완벽할 수 없는데 완벽을 추구하면
1. 자신에게 엄격해집니다.
2. 일을 완벽하게 하려니 스트레스가 높습니다.
3. 일을 완벽하게 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을 비난하기 쉽습니다.
4. 실수했을 때 자신을 비난하는데 강도가 높습니다.
5. 혼자 있을 때도 평안하지 않습니다.
다른 말도 많이 붙일 수는 있겠지만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은 피곤합니다. 스스로도 피곤하고 남도 피곤하게 만듭니다. 이런 사람은 죄책감의 늪에서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누구나 일을 잘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얼마나 잘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서로 기준이 다릅니다. 금의 순도를 말할 때 99.999 같이 소수점 이하 몇 자리까지 인지가 매우 중요하고 가격도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준은 어떻습니까? 스스로에게 관대한 편입니까? 아니면 엄격한 편입니까?
여기서는 남에 대한 기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기독교 내에는 오래된 논쟁이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중요 인물 중 하나인 존 칼빈은 5대 교리에서 전적인 타락을 말합니다. 인간은 완전히 타락해서 스스로는 절대로 하나님을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반대쪽에서는 부분적인 타락이라서 스스로 하나님을 찾을 수 있다고 합니다.
완전한 타락이면 스스로에게는 방법이 없으므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에 기대해야 합니다. 부분적 타락이면 스스로 노력해서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거죠. 여기에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왜 죄책감 이야기하다가 종교이야기 하는지 궁금하시죠.
저는 완전한 타락이라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믿는데요 이게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스스로에게 완전히 실망해서 나는 할 수 없다는 결론은 내보신적이 있나요? 완전히 망해서 이제 죽는 것 밖에는 길이 없다고 생각해 보신 적이 있나요? 진짜 바닥이라고 느껴보셨나요?
저는 제 자신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실수하거나 잘못했을 때 그건 당연히 일어날 일이라고 인정을 합니다. 그래서 저에게는 예수 그리스도 구원자가 필요합니다. 어떤 사람은 나약해서 그렇다고 하기도 하고 현실 도피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전보다 더 일 잘하고 전보다 더 당당하고 전보다 더 저를 사랑합니다.
아마도 죄책감에 시달리는 분들은 위의 경험들이 거의 없으실 겁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책망하고 혼내는 것은 그래도 가능성이 보이기 때문입니다. 전혀 가능성이 없는 사람에게는 훈계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냥 내버려 두거나 관계를 단절하겠죠.
완벽한 누군가가 있다면 그는 더 이상 사람이 아닌 신이겠죠. 스스로가 절대로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출발입니다. 내가 약속을 잊어버린 것도, 내가 해야 할 일을 놓친 것도, 내가 오해한 것도 모두 내가 인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실수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당연 - 나는 인간이고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실수는 당연하다.
필연 - 실수나 실패는 나의 인생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절대 -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는 다른 사람과 시스템의 도움이 절대로 필요하다.
우리는 사회적으로도 실패를 경험하면 그 실패를 다시 하지 않기 위해서 방안을 모색합니다. 법을 바꾸고 제도를 만듭니다. 감시와 감독을 더 철저히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조금씩 실패를 줄여 나갑니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사회가 만들어지고 또 앞으로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기 싫어합니다. 그것을 인정하면 스스로 무너질 것 같기 때문이죠. 그래서 감추게 됩니다. 남에게 잘못을 전가하게 됩니다.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나는 잘못이 없는데 그 실패가 일어난 것은 다 너희들 때문이라고 우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결국은 무너집니다.
제 아내는 저와 성격이 아주 다른 사람입니다. 추진력이 강하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높으며 그렇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비하와 비난의 말을 잘하기도 하고 밖으로는 표현하지 않아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와 운전하는 것으로 정말 많이 다퉜는데요, 지금은 같이 차를 타는 경우 저는 거의 운전을 하지 않고 아내가 운전을 합니다. 우리의 타협이죠. 아내가 운전하면 저는 보조석에서 잘 잡니다. 아내는 내가 운전하면 잠을 못 잡니다. 운전하는 것보다 옆에 앉는 것이 더 피곤하다고 합니다. 신경 쓸게 많아서죠.
아내를 비난하려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저와 다른 성격에 또 완벽주의자에 가깝기 때문에 예로 들었습니다. 아마도 여러 유형의 완벽주의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성격도 어쩌면 상당히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공통적으로 내면의 평화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생각해야 할 것들이 정말 많기 때문입니다. 내가 한 일에 대해서 누가 어떻게 생각할지도 신경 쓰이고 혹시 내가 실수한 것을 다른 사람이 알아차릴까 봐 걱정합니다.
이제 결론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의인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찾으러 왔다. 그 당시 유대인 바리새인은 완벽한 율법을 지킨다는 것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찾지 않으시고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이름으로 불리셨습니다. 여러분은 스스로 완벽하다는 것을 자랑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나는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했던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으시겠습니까? 누가 평안을 얻게 될까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평안히 가라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누가복음 7장 44-50절)
(글이 논리적으로 좀 잘 연결 안되는 면이 있어 보입니다. 필요하면 다음에 천천히 더 생각해 보고 정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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